난의 역사(歷史)

매년 수많은 교배종이 나오고 있는 서양란(西洋蘭)에 비해 동양란(東洋蘭)은 모두 원종(原種)의 실생번식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일찍부터 매화와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四君子)로 추앙받으며 식물 이상의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중국(中國)의 난 역사

난이란 단어는 아득한 옛날인 기원전 6세기경에 공자(孔子 : 552년~479년 B.C.)에 의해서 엮어진 시경(詩經 : 기원전 6세기에 불려지던 詩들을 공자가 모아 엮은 책)에서부터 나오고 있다. 두 편의 시에 난이란 단어가 언급된다. 난이란 식물이 원래부터 군자의 의미를 부여받은 것은 아니었던지 구애(求愛)의 수단으로 쓰이는 물표이거나 아리따운 아가씨의 모습을 비유하는 표현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시경에서 나타난 난의 기록은 다시 3세기경에 위(魏)의 왕숙(王肅)이 편찬한 공자가어(孔子家語 : 공자의 언행 및 論議를 수록한 책)에서 나타나는 바, 비로소 군자의 격으로 비유된다. 그러면서 문인, 묵객들에 의해 그려지고 읋어지며 자연스레 군자의 이미지를 지닌 식물로 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당시의 난은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난과 식물학상 같지 않다. 남송(南宋)의 주희(朱熹)가 1199년에 간행한 초사변증(楚辭辯證)을 보면 확실히 달랐다는 얘기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지금의 난이 발견된 것은 당(唐)나라 말기이다. 이것이 북송시대(北宋時代)의 중기, 그러니까 11세기 중엽에 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남송시대(1127~1278년)에는 벌써 원예적으로 크게 재배가 성행했다.

처음에는 함께 난으로 불리다 점차 지금의 난이 진란(眞蘭)으로 굳어진 것이다. 북송시대 이전에 난으로 불리던 식물은 지금 등골나무속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오늘날 난을 이야기할 때 공자시대의 난을 따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군자의 품격을 갖는 식물을 찾아 군자의 이미지를 부여했으며, 더욱 군자의 이미지에 맞는 오늘의 난으로 자연스럽게 옮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남송시대에 활짝 꽃을 피우기 시작한 난문화는 13세기에 들어 조시경(趙時庚)의 금장난보(金障蘭譜), 왕귀학(王貴學)의 왕씨난보(王氏蘭譜) 등 난에 관한 책자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또한 묵란화(墨蘭畵)는 문인들 사이에 크게 유행되어 명대(明代)에 이르러서는 수묵사군자(水墨四君子)의 하나로 완전히 자리를 굳혔다.

우리나라의 난 역사

우리나라에서 난이란 글이 처음 기록으로 남는 것은 9세기경에 활동하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에 문장이다. 夫人德芳蘭蕙라 하여 당시 왕비의 덕을 난혜(蘭蕙)에 비유하였다. 최치원은 그외 다른 싯귀에서도 난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최치원이 활동하던 시기는 9세기 말이고 당나라에서는 이미 난이 발견된 시점이니 오늘날의 난으로 해석해도 되겠다.

고려시대에는 이규보(李奎報), 이곡(李穀), 정몽주(鄭夢周) 등 많은 문인들이 난을 읊었다. 묵란화 또한 고려말의 옥서침(玉瑞琛)이나 윤삼산(尹三山) 등에 의해 그려졌다는 기록이 전해지니 시인묵객(詩人墨客)들에 의해 활발하게 난이 사랑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묵란화는 조선 선조시대의 이징(李澄)이 그렸다는 춘란도(春蘭圖)이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이미 난은 선비들의 필수적인 소양이 되었던 바 김정희(金正喜), 이하응(李昰應), 민영익(閔泳翊) 등의 묵란화는 오늘날에도 서화의 최고품으로 대접받고 있다.

이렇듯 왕성한 문화를 자랑하던 난도 당시에는 모두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그러다 우리나라에도 난이 난다는 것을 안 것은 조선조에 들어와서인 것 같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세종(世宗) 31년인 1449년에 강희안(姜希顔)에 의해서 저술된 양화소록(養花小錄)에 의해서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난에 대한 기록으로는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배양하는 방법까지 나왔으니 이미 관념상의 난이 아닌 실제의 난에 대한 기록이요, 더군다나 우리나라 호남지방에 자생하는 난에 대한 언급인 것이다. 관련된 부분을 옮겨본다.

本國蘭蕙品類不多 移盆後葉漸短香亦劣殊 失國香之義 故看花者不甚相尙 然生湖南沿海諸山者品佳 霜後勿傷垂帶舊土依古方載盆爲妙 우리나라에는 난혜의 종류가 많지 않다. 분에 옮긴 후 잎이 점점 짧아지며 향기 역시 겨우 나는 정도여서 국향의 뜻을 잃는다. 고로 꽃을 본 자는 심히 좋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호남 연해의 여러 산에서 나는 것은 품종이 아름답다. 서리가 내린 후에 뿌리가 흐르지 않게 구토(자생지의 토양)로 싸주고 옛 방식처럼 분에 심으면 좋다.

이후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산림경제(山林經濟),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등 많은 문헌에서 난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눈여겨 볼 만한 기록은 신경준(申景濬 : 1715~1781년)의 여암유고(旅菴遺稿)이다. 我國濟州獨有蕙란 문귀가 보이는 바, 당시의 혜(蕙)란 일경다화(一莖多花)를 뜻하니까 바로 제주한란(濟州寒蘭)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한란이 우리나라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유명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에 의해서다.

난에 대한 기록이 제법 발견되고 문인들의 필수 소양이 되어 시문(詩文)이나 묵란화(墨蘭畵)가 그려졌지만, 당시에 실제 많은 배양이 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극히 상층부나 일부 문인들에 의해 그것도 대다수는 관념에 의해서만 전해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근대로 들어서도 난을 기르는 것은 극히 일부였다. 아무리 이병기의 난초란 시조가 알려지고 추사의 난화가 알려졌지만 일부 부유층이나 지식층이 아니라면 실란을 보기 어려웠다. 해방 후 실란을 접하기가 쉬워졌지만 역시 대중에게 난은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식물이었다.

난이 우리나라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본격적으로 배양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의 일이다. 특히 1981년에 취해졌던 수입자유화에 힘입어 난은 하나의 붐을 형성하여 대중에게 다가왔다. 여기에 한국춘란(韓國春蘭)이라는 우리의 난이 난취미계를 주도하며 급기야 엄청난 붐을 조성,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전국 어느 곳을 가더라도 난동호회가 만들어지지 않는 곳이 없으며 난전문점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하나의 커다란 난문화계를 형성하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