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난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난을 배양한다.

난은 마지막에 정착하는 취미세계라고도 말하여진다. 한번 난의 세계로 접어들면 빠져나가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과연 난의 아름다움에는 어떠한 것이 있기에 하나의 식물이 이토록 칭송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아름다운 꽃, 맑은 향기, 유연한 멋을 풍기는 멋진 잎선…. 그러나 단순히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토록 세분화된 미적 세계를 형성하고 있으면서도 단순히 외형적인 것만으로는 이토록 많은 칭송과 사랑을 받을 수 없다.

옛부터 난은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칭송받으며 매화와 국화, 대나무와 어우러져 가장 선비의 멋을 간직한 식물로 인식되어 왔다. 지금은 다분히 대중화되어 난문화(蘭文化)란 용어가 낯설지 않지만, 바로 얼마 전만 하더라도 난은 고고한 식물로 가까이 하기에 어려운 식물이었다. 난을 노래하고 그리던 많은 시인묵객들도 직접 실제의 난을 접한 것이 아닌 관념의 눈으로 난을 그리고 읊었다.

난의 어떠한 점들이 그토록 높은 정신세계를 형성하고 있었을까. 난의 아름다움은 외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바로 이 내적인 아름다움을 얼마큼 이해하느냐에 따라 단순한 식물로도, 그 이상의 것으로도 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난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난의 내적인 아름다움을 찾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식물로서의 아름다움

사계절 푸르름을 선사하는 난은 단지 푸르름만이 아닌 멋진 잎선을 갖고 있다. 종류에 따라 이 멋진 잎선에서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 향기가 없으면 그만큼 화사한 꽃자태로 멋을 낼 줄도 안다. 꽃이 아니면 잎무늬로 멋을 내니 식물에서 나타낼 수 있는 모든 무늬를 갖고 있기도 하다.

사랑을 받은 만큼 맑은 새촉으로 기쁨을 주고 꽃대를 올리며 화예품(花藝品)이니 엽예품(葉藝品)이니 어느 것 하나에는 반드시 자기의 특색을 올리고 있다. 짙고도 맑은 향은 맑은 정신을 주며 장수(長壽)를 약속하기도 한다. 향기가 없으면 그만큼 다른 쪽에서의 장점을 갖고 있다. 욕심이 많은 품종들은 양쪽을 동시에 갖기도 한다.

사시난향(四時蘭香), 사계난향(四季蘭香)이라는 말은 품종별로 사계절 난향을 맡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일차원적인 뜻이 아닌 한 품종에서도 일년 내내 그 아름다운 난의 향기를 접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외적인 아름다움이 그대로 내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것에 바로 난의 아름다움이 있다.

눈으로 보여지는 내적인 아름다움

외적인 아름다움이 어떻게 내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될까. 사군자를 이해하면 이러한 의문은 금새 풀릴 것이다.

매화는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운다. 국화는 서리를 맞으며 짙은 향내를 토한다. 대나무는 부러지기는 할지언정 굽지는 않는다. 바로 이들이 사군자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이유이다. 그렇다면 난은 어떠한 점에서 사군자에 들어갔을까.

매화나 국화, 대나무는 모두 시리에 영합하지 않는 선비들에 비유된다. 이 점은 난 역시 마찬가지다. 일년 내내 푸르른 잎은 한겨울의 혹한기에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다. 자생지에서 보더라도 난잎은 눈 속에서도 독야청청한다. 질 때에도 흐물흐물 시들어 죽는 것이 아니다. 꼿꼿한 자세에서 그대로 말라버리고는 그냥 뚝 떨어져 버리는 것이 바로 난이다. 시리에 영합하지 않는 선비의 모습을 이처럼 잘 나타내는 식물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이런 이유로 난은 사군자에서도 그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숨어있는 아름다움들

난을 기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난에게는 이러한 아름다움이 담겨있노라고 나름의 느낌을 이야기한다. 누구는 사랑을, 누구는 기다림을, 누구는 중용(中庸)을 이야기한다. 때로는 관조(觀照)의 세계를, 때로는 조화의 아름다움을, 심지어는 효(孝)의 아름다움을 말하기도 한다. 어떻게 와닿느냐에 따라 그 느끼는 폭은 십양십색(十樣十色)일 수도 있다. 어느 식물이 있어 또 이렇게 큰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특히 사랑은, 기다림은, 중용은 난을 사랑하여 애배하는 사람이라면 열이면 열 모두가 입을 모아 칭송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난은 사랑을 알게 한다. 주인의 발자욱 소리를 들으면서 자란다는 말은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만큼 자라주는 식물이란 뜻이다. 그냥 갖다가만 놓고 돌보지 않는 난은 결코 잎으로 윤기가 흐르지 않는다. 새싹을 올려도 건실하지 못하다. 꽃이 펴도 그냥 피었을 뿐이다. 그러나 매일 나의 발자욱 소리를 듣고 자라는 난은, 매일 나의 귓속말을 들은 난은 누가 보아도 탐스럽고 멋진 자태를 스스로 뽐낼 줄 알게 된다. 난은 사랑을 아는 식물이요, 사랑을 알게 하는 식물이다.

난은 기다림을 가르쳐준다. 새촉이 나오고 자람도, 꽃망울이 생기고 꽃을 피움도 계속되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특히 어린 촉부터 기른다면 하나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몇 년이 걸릴는지 모를 일이다. 흔히 춘란은 3년이요, 한란은 7년이란 세월을 공들여야 꽃을 볼 수 있노라 말들을 한다. 또한 꽃눈이 나와서도 적게는 수십 일이요, 많게는 백수십 일을 기다려야 꽃이 핀다. 한란은 100일도 더 지나야, 춘란은 200일도 훨씬 지나야 비로소 꽃을 피운다. 갈수록 조급함만 심해지는 인간사에서 난은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다.

난에는 중용의 미학이 있다. 햇빛도 물도 습기도 비료도 이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면서도 넘치면 싫어하고 부족해도 싫어한다. 모든 것이 적당해야 가장 좋은 환경이 된다. 필요한 만큼만이 가장 좋은 상태요, 넘치면 오히려 해가 된다. 난은 오로지 내가 많이 가져야만 행복하다는 생각을 가진 인간에게 손 가는 곳마다 중용의 미학을 역설해주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난의 미학은 가장 보편적인 미학이요, 사람에 따라서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세세한 미학을 느낀다고 한다. 아주 작은 것에서 아주 큰 것까지 난은 인간에게 많은 것을 주고 있다. 느껴서 마음에 싣는 것은 기르는 사람들의 몫이라 하겠다. 하나하나 그냥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난은 인간에게 무한정의 아름다움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